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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등장인물 이름 정리-독립운동가 이름들이었다!

영화 파묘는 현재 누적 관객수 959만명으로 천만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OTT 시장의 확대로 주춤했던 영화계에 오랜만에 천만관객의 영화가 나오다니 정말 대단한 인기네요. 시나리오를 직접 쓴 장재현 감독이 파묘 등장인물 이름을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썼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파묘 등장인물 이름은 독립운동가

최민식님의 김상덕

(1891.12.10. ~ 1956.4.28.)

김상덕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경북 고령 출신으로, 일본 유학 중 2.8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습니다. 광복 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을 지냈으며,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6.25 전쟁 중 북한에 피랍되어 사망했고,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김고은님의 이화림

(1905~1999.2.10.)

이화림은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양과 청진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눈떠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30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이봉창, 윤봉길 등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이화림은 임시정부에서 “동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밀정을 색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봉창의 일본 폭탄 투척과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훙커우 사건 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기며 김구와의 결별 후 공산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1938년 김구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공산주의자임을 재확인한 후 연을 끊었습니다. 이후 중국 광저우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을 이어갔고,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의용대에 합류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했습니다.

1999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유언에 따라 전재산을 대련시 조선족 학교에 기부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연변작가협회에서는 화림문학상을 수여하며 그녀를 기렸습니다.

 

 

유해진님의 고영근

(1853년 ~ 1923년)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개화파 정치인으로,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독특한 역사적 행보를 남긴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조선 말기의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이들 중 하나로서, 국내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고영근은 함경도 매광감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거쳤으며, 특히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우범선을 일본에서 찾아가 암살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군인이나 관료를 넘어 시대의 큰 흐름 속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린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고영근의 인생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우범선 암살 사건입니다. 우범선은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에 관여한 인물로, 일본으로 망명한 후에도 조선인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고영근은 1903년 우범선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칼로 살해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를 자처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사형 선고와 이후 고종의 선처로 인한 감형으로 이어지며, 복잡한 조선 말기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암살 사건 이외에도, 고영근은 개화 사상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 민권운동과 계몽 강연에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단지 한 시대의 군인이나 관료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진보를 위해 헌신한 개화기의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도현님의 윤봉길

(1908.6.21.~1932.12.19.)

윤봉길은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이후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1921년에는 성주록의 오치서숙에서 중국 고전을 익혔습니다. 1926년 서숙 생활을 마친 후 농민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을 통해 농촌 부흥에 힘썼으며,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청소년을 교육했습니다.

1929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같은 해 기사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들을 규합해 월진회를 조직하고, 수암체육회를 운영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1930년 만주로 망명을 시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했습니다. 1931년에는 상해로 이동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동포 실업가 박진의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윤봉길은 4월 29일 천장절 기념식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행동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감독의 의도 더보기

감독이 유퀴즈에서 밝히길 OTT에서 우연히 본 사무리이에 관한 이야기에서 임진왜란부분을 보고 우리나라의 처절한 모습에 더이상 볼 수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고 언젠가 그 응어리를 풀고 싶어 영화 곳곳에 이런 장치들을 넣었는데 유명한 포스터의 한반도 지형이 그 대표적입니다.

등장인물을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잠깐씩 지나가는 차번호에도 의미있는 번호를 넣는 등 감독나름대로 항일에 대한 것들을 표출해 내고 있었습니다.

  • 운구차 번호 1945(광복)
  • 이화림 차 번호 0301(삼일절)
  • 김상덕 차 번호 0815 (광복절)

파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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